산업 뜯어보기

AI 시대는 사실 "메모리 이야기"다 🧠

생각에 잠긴 초록이 아빠

AI 하면 보통 똑똑한 모델이나 그래픽 칩을 떠올리죠.

그런데 산업 구조로 보면, AI는 상당 부분 메모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.

오늘도 종목 말고 구조로 풀어볼게요.

계산은 빨라졌는데, 숫자를 못 나른다

AI 모델은 결국 어마어마한 숫자 뭉치입니다.

계산 자체는 그래픽 칩이 합니다. 그런데 계산하려면 그 숫자를 칩 앞까지 날라다 줘야 해요.

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. 계산 속도는 빨라졌는데, 숫자를 나르는 속도가 못 따라갑니다. 아무리 빠른 요리사가 있어도 재료가 늦게 오면 소용없는 것과 같아요.

AI에서 병목은 계산이 아니라 ‘나르기’다.

그래서 나온 게 HBM입니다. 우리말로 하면 ‘고대역폭 메모리’인데, 이름 그대로 한 번에 많이 나르는 메모리예요. 메모리 칩을 옆으로 늘어놓는 대신 위로 쌓아 올려서, 칩과 주고받는 길을 확 넓힌 방식입니다.

같은 면적에서 기존 메모리보다 훨씬 빠르게 데이터를 보내면서 전력은 오히려 덜 씁니다. AI 서버가 늘어날수록 이 HBM이 같이 팔릴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.

칩 하나에 나라 다섯 개

여기서 제일 흥미로운 지점.

반도체 칩 하나는 여러 단계의 분업으로 만들어집니다. 그리고 각 단계마다 세계에서 잘하는 회사가 두세 곳뿐이에요.

반도체는 한 덩어리가 아니다 — 단계별 분업 지도

크게 다섯 길목으로 나눠 보면 이렇습니다.

설계 — 무엇을 만들지 도면을 그립니다. AI용 그래픽 칩 쪽은 엔비디아가 사실상 기준을 정하고 있어요.

장비 — 만들 기계를 공급합니다. 회로를 아주 미세하게 그리는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사실상 독점입니다. 그 외 공정 장비는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, 일본 도쿄일렉트론 같은 곳이 나눠 갖고 있어요.

소재 — 회로를 새길 바탕판(웨이퍼)과 화학 재료를 댑니다. 일본 쏠림이 가장 심한 자리예요.

웨이퍼는 일본 신에츠와 SUMCO가 1·2위로 절반 이상을 쥐고 있고, 대만 글로벌웨이퍼즈·독일 실트로닉·한국 SK실트론이 뒤를 잇습니다.[3]

회로를 그릴 때 쓰는 감광액(포토레지스트)은 더합니다. 일본 JSR·신에츠화학·도쿄오카공업 세 곳이 전체의 70% 안팎, 첨단 공정용만 보면 90%에 가까워요.[3]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가 왜 그렇게 큰일이었는지가 이 숫자에 있습니다.

제조 — 실제로 찍어냅니다. 첨단 공정은 대만 TSMC가 압도적이에요.

메모리 — 숫자를 저장하고 나르는 쪽입니다. 여기는 사실상 세 회사가 전부예요. SK하이닉스, 삼성전자, 그리고 미국 마이크론.

HBM만 떼어놓고 보면 쏠림이 더 심합니다. 2026년 1분기 기준 SK하이닉스가 58%,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각각 21%였어요.[1] 세 회사가 나눠 갖되 한 곳이 절반을 넘긴 구도입니다.

수요가 어느 정도냐면, SK하이닉스는 2026년 생산 물량을 이미 다 팔았습니다.[2] 만들기도 전에 임자가 정해진 셈이에요.

다만 이 구도가 그대로 갈지는 아직 모릅니다. 다음 세대인 HBM4로 넘어가면서 순위가 재편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데, 기관마다 예측이 꽤 갈립니다. 지금 1위가 그대로 갈 거라는 쪽도, 격차가 좁혀질 거라는 쪽도 있어요. 저도 어느 쪽인지는 모릅니다.

그래서 “반도체”를 한 덩어리로 보면 안 됩니다. 어느 길목을 쥐었느냐가 전부예요. 원전 글에서 밸류체인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.

그런데 — 이건 사이클이다

제일 중요한 한마디.

반도체는 좋을 때와 나쁠 때가 크게 오가는 사이클 산업입니다.

왜 그런지가 구조에 있어요. 공장 하나 짓는 데 몇 년이 걸립니다. 수요가 몰려도 당장 늘릴 수가 없어요. 그래서 값이 뜁니다.

값이 뛰면 다들 증설에 들어갑니다. 그런데 그 공장들이 완성될 즈음이면 수요는 이미 한 차례 꺾여 있죠. 이번엔 물량이 남아돕니다. 값이 떨어지고, 투자가 멈추고, 다시 부족해지고.

늦게 오는 공급이 사이클을 만드는 겁니다. 지금은 AI 덕에 수요가 강한 국면이에요. 하지만 사이클엔 끝이 있습니다.

그래서 저는 이런 산업을 볼 때 “지금 사이클 어디쯤인가”를 늘 같이 봅니다.

정리

  • AI의 병목은 계산이 아니라 데이터를 나르는 속도 — 그래서 HBM이 뜬다
  • 반도체는 극단적 분업 — 길목이 전부고, 길목마다 주인이 다르다
  • 공장 짓는 시간이 길어서 사이클이 생긴다. 지금 어디쯤인지를 같이 봐야 한다

이렇게 뜯어보면 뉴스 속 “슈퍼사이클” 같은 단어가 다르게 들려요.

오늘도 한 걸음. 🐴

이 글은 산업 구조와 만드는 과정을 정리한 개인 기록입니다.
특정 종목의 매수·매도 추천이 아니며, 투자 판단과 그 결과는 독자 본인에게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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